드로잉의 언어와 소통의 전망

 

 

 

 

 

소통의 가능성을 열면서 : 예술, 그 유희세계로의 초대

   

 

글 / 김옥렬

 

예술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우선 창조가 있어야 한다. 예술가의 창조는 그 자신의 상상과 정취(情趣)에 비례한다. 그런데 창조와 감상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다. 모든 예술작품은 창조 없이 감상할 수 없고 감상 없이 창조할 수 없다. 그래서 좋은 감상능력을 지니는 것이 동시에 좋은 예술작품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것을 감상해 줄 사람이 있다는 전제 하에서의 일이다. 예술을 창작하고 그것을 유지해 나가는 일은 단지 한 개인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감상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예술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은 창조와 감상이 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창조하는 중에 감상이 깃들어 있고, 감상하는 중에 창조가 있다. 감상이 하나의 예술적 경험을 가지는 것이라면 창조는 더 나아가 예술적 경험을 표현하여 구체적인 작품으로 이루어 놓는 것이다. 그런데 예술적 경험을 밖으로 표출하여 형상화하거나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타고난 소질과 노력을 상당히 필요로 한다. 그렇다고 예술이 그리 멀리 떨어져 있거나 어떤 특별한 사람의 것일 수는 없다. 예술적인 경험은 놀이 중에서 창조되어 감상하는 심리활동이 포함되어 있다. 모든 사람이 예술가는 아니어도 어린 시절 놀이에 대해서는 누구나 어느 정도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예술의 창조와 감상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유희 즉, 놀이이다.

 

예술과 놀이가 지닌 공통점은 놀이도 예술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정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어린아이가 빗자루를 탈 때 마음속에서 정말 말을 타는 것과 같이 재미있고 그래서 지금 타고 있는 것이 말이 아니라 빗자루라고 하는 것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정신이 팔릴 대로 팔려서 비록 놀이이긴 하지만 놀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놀이는 예술과 마찬가지로 죽어있는 우주를 살아서 약동하는 정신으로 만든다. 그래서 어린이는 어른 보다 더욱 솔직하게 예술작품을 대한다.

 

어른들은 인간과 사물의 분계선을 아주 분명하게 ‘상상의 것’과 ‘실제의 것’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어린이의 마음에는 이러한 구분이 아주 모호하다. 어린아이는 사물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생명이 있어 아프고 가려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린아이가 빗자루를 말로 생각하고 타는데 어른이 그 빗자루의 한 가닥을 뽑아 버린다면 어린아이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뽑힌 것처럼 생각하며 아파할 것이다.

 

어린아이가 별을 친구로 생각하고 꽃잎에 맺힌 이슬을 그 꽃이 흘린 눈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주의 인정화(人情化)이다. 인정화는 어린아이가 사물을 체득하는 방식이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 갈수록 이정작용(移情作用)을 할 수 없어지고 자아와 사물과의 거리가 멀어진다. 또 실제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사이의 틈도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때문에 삶에 대한 흥미도 사랑도 점점 식어 가는 것이다.

 

인간은 예술을 통해서 무한을 추구한다. 그것은 어린아이가 놀이를 통해서 얻는 즐거움과 통한다. 인간은 스스로 공중에다 누각을 짓는다. 고민은 인생의 유한(有限)에 대한 불만에서 일어나고 환상은 무한(無限)에 대한 추구이며, 놀이와 예술은 환상의 결과이다. 그것은 현실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이를테면 예술은 자아와 사물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며 동시에 인생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하는 힘이고 창조의 결실이다. 그런데 창조에는 반드시 감상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하여 지금 점점 사랑이 식어가고 있는 사람이여  무한에의 동경과 그 소통 가능성의 세계로 그대를 초대합니다.

 

정 태 경 - 황무지 그리고 공휴일의 노래

 

이번 ‘드로잉의 언어와 소통의 전망’전에서 보여 주는 정태경의 작품들은 꽃, 풀, 감자 등 식물의 줄기나 잎을 동양화의 수묵과 같은 분위기로 나타내고 있다. 그는 시골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이나 꽃들을 다양한 방식(물의 농담조절, 흘러내림, 갈필 등)으로 변형시킨다. 어떤 경우는 화면전체를 균일하게 그저 얇은 색채로 덮어 몇 번의 필치로 가장 기본적인 형태만을 표현하고(접시꽃과 질경이, 민들레, 주전자 모양의 도자기 그림) 있으며 또 어떤 경우는 기본 형태를 반복시켜 그리기도 하고(감자 그림), 혹은 한번에 완성된 선적 요소와 색채의 조화(나리꽃, 방울토마토 등)에서 간결하게 나타내는 압축된 자연의 이미지가 마치 초등학교 시절의 식물채집을 상기시킨다.

                                           

나는 정태경씨가 새로운 실험 내지 문제를 던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아니라면 시작해야 한다. 예술작품의 매체가 전통적이든 현대적이든 동양적이든, 서양적이든 간에 예술이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현실의 모든 삶에 대한 양상들을, 그 반응을 포괄해야 한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말해왔던 목소리들이 허공에 있음을 느꼈던 듯하다.(그는 소리를 질러본다 / voice 시리즈) 그것은 다름 아닌 지난해 그의 아홉 번째 개인전인 ‘황무지’를 통해서 더욱 강하게 드러났다. 개인전의 주제가 되었던 그의 황무지는 버려진 땅이 아니라 노동의 땀도 외면되는 지쳐서 소진한 바로 화가의 땅이었다.

 

정태경씨에게서 떠올려 지는 것은 삶과 예술에 대한 부단한 물음을 갖게 한다는 점이다. 그는 누구 보다 열심히 그림 농사를 짓지만 언제나 궁핍한 현실 속에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삶을 사랑하고 예술을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는 작가이다. 그의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놀라움은 끊임없이 주변의 삶, 그리고 그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일상적인 풍경의 디테일까지 자기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시선은  작가적인 야심을 가지고 응시하는 시선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삶과 예술의 근원적인 일치를 통해서 이루는 것이다. 그의 삶의 시선에는 작은 풀소리, 고통과 무관심의 주변까지 본능적으로 예술로 만드는 독특한 능력이 있다.

 

그는 이제 새롭게 작은 씨를 뿌린다. 땅은 언젠가는 땀을 외면하지 않는 다는 믿음으로 접시꽃 / 호박꽃 / 해바라기와 나리꽃 / 방울토마토와 감자를 키우는 씨를 뿌린다. 그래서 그가 담아내는 그림은 경쾌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함이 묻어난다. 그가 뿌린 씨앗이 언제 풍성한 열매를 맺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가 소진한 땅에서 허허로운 휴식(그는 내게 물었다 화가의 공휴일에 대해서)에도 붓을 들고 있음을 본다. 그는 정직하고 고집 있는 작가이다. 그림에 대한 끊임없는 그의 열정은 언젠가 황무지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다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임 수 희  - 반복되는 사각과 빛의 공간성

 

임수희의 최근 작업들은 빛과 사각의 질서 있는 변화를 고도의 긴장된 공간으로 이끈다. 그것은 자유에 대한 갈망을 오히려 사각의 꽉 막힌 면으로 치환하고 있음이다. 그는 “사각의 면을 수용하고 싶다”고 말한다. 사각의 면들을 나누고 결합시켜 가는 과정 속에서 그는 미묘한 변화를 감지해 나가고 나름의 독특한 시각적 경험을 유도해 낸다. 이러한 작품은 지난해 개인전에서 보여 주었던 ‘Mode’ 시리즈에 포착되어 있다.

 

그의 빛과 사각의 이미지는 미래파나 구성주의에 뿌리를 두고 순수하게 시각적으로 제작하고자 했던 옵티컬 아트(Optical art)와 유사한 성격을 갖는다. 그것은 그가 추구하는 다이나믹한 빛과 사각의 면이 지닌 반복된 이미지와 색의 변화에서 나타난다. 그는 옵 아트의 두 가지 계열, 움직이는 빛의 형태 및 빛의 공간을 추구하는 키네틱한 옵아트와 다른 하나인 평면상에서 구성하는 회화적인 옵아트 중에서 특히 후자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옵아트의 지적이고 조직적인 그래서 차가운 느낌을 주는 요소들을 제거하고 사각의 이미지와 빛의 변화를 부드럽고 따뜻한 눈으로 포착한다.

 

1996년 개인전 이후 임수희의 작업 성과들이 다시 보여지는 것은 이번 드로잉전에서의 작품들이다.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드로잉적인 요소는 대학원 재학시에 추구한 파도 / 비가 오는 날 등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 파도나 비의 이미지에서 그는 단 한번의 붓질도 없이 단지 로울러 만으로 조형적 언어를 표현해 낸다. 그는 자연의 이미지를 추상적인 선들을 통해서 그 자신의 심리적 상황 안으로 끌어들인다. 자신의 심리적 상황 속에서 용해되어 토해지는 억압된 감정의 분출로 나타난 자연의 이미지가 약동하는 세계로의 동행을 강요한다. 임수희의 드로잉이 갖는 소통에의 욕구란 바로 자신의 심리적 상황의 문제에서 출발된다. 내가 느낀 바다는 곧 우리가 보는 바다가 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사각의 변형들이 한정된 세계를 떠나 무한성의 세계로 향하고자 하는 갈망이 사각의 반복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겹쳐진 사각의 이미지)

 

임수희는 사각지대를 배회하면서 사각이 주는 이미지의 한계를 벗어나거나 혹은 그 자체로 받아들여 보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작업에서는 새로운 이미지를 연출해 내려는 구상이 깔려있다. 이를테면 하나의 한정된 화면 속에서 기초되었던 사각의 면들을 서로 분리하여 자신이 기획한 작업구상을 엄격한 질서로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성적 요소에서 발견되는 점은 일루전(illusion)의 극소화인 ‘최소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니멀(Minimal)의 극단적인 간결성을 연상시킨다.

 

최근작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점은 요즘 그는 그림을 분해하고 또 그것을 새롭게 배열하고 조직해 나가는 놀이에 푹 빠져있다는 사실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그림 없는 카드놀이와 같아 보인다. 그러나 한 작가에게 중요한 것이 단지 사물을 묘사하는 것만이 아니라면, 그것은 분명 재창조, 증가, 확장 등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송 상 무 - 압축된 이미지로서의 인간像

 

송상무의 그림은 거의 검은색 톤으로 일관되어 있다. 이번 드로잉전에서 보여주는 그림들, 그리고 이전의 작업에서도 검은색 그림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검은 색을 주된 표현수단으로 삼는 이유를 “알록달록한 색채들은 시각을 현혹시키기 쉽다. 그래서 나는 검정 색이 주는 압축된 이미지를 통해서 힘을 표현하고 싶다”고 한다.

 

송상무의 그림에서 사용된 재료는 주로 숯가루와 안료이다. 그리고 그가 나타내고자 하는 중요한 요소는 인체의 부분적인 모습을 가능한 형상을 배제하고 압축된 색과 절제된 이미지로 끌고 가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그림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이러한 독특한 방식, 이를테면 모든 색의 분산된 이미지를 제거하고 무채색이 겹쳐지면서 만들어 내는 힘의 변화에 주목하고자 했던 것이다.(두상, 인체의 부분)

 

송상무가 형상화하는 인체의 상은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두상으로 표현되는 정신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을 담고 있는 신체의 문제이다. 그의 그림에서 표현되는 두상은 인간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생각으로 상징되는 것이다.(타원형의 두상)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인간의 정신을 표현하고자 집착하는 그의 일면에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 또한 내재되어 있다. 차라리 알고 싶지 않은, 모르는 게 약이라는 역설이 개와 인간의 두상으로 병치된다.(개의 두상과 인간의 두상) 그러나 더 알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은 결국 해부되어 해골로 남는다.(해골像)

 

어쨌든 송상무가 지금까지 일관되게 풀어내고자 하는 문제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려는 노력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모든 색의 분산된 이미지를 제거해나가는 데서 시작된다. 그래서 결국 남게되는 색은 검은색이다.

 

정 혜 진  - 인간, 그 욕망에 대한 은유(隱喩)

 

이번 드로잉전에서 정혜진은 비교적 사실적인 방법으로 나무들의 형상을 그려낸다. 여기서 보여주는 나무들의 형상은 다양하다. 마치 인간의 신체를 연상시키는 굵은 나무줄기와 하늘로만 향하려는 가지들은 신체 중에서도 팔이나 머리카락을 닮아있다.(다섯 개의 나무형상) 그리고 ‘헛된 가지 끝에서 울고 있는 삶의 새’라고 쓰여진 그림에서는 다소 허무주의적인 색채를 띤다. 그것은 언제나 추락이 전제되어 있는 상승, 혹은 죽음이 전제된 삶이라는 필연성에 의해서 길은 영원하지만 나는 유한하다는 비극적 자아인식을 통해서 삶의 덧없음을 환기시키는 듯 하다. 또한 바람에 의해서 휘어진 나무를 그린 그림에서는 위(높은 곳)에 있을 수록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을 잔잔한 시선으로 포착한다. 나무로 은유 된 인간의 욕망은 진정한 삶의 근원적 물음에 부딪힌다. 그는 현대인의 보편적 정서인 고독을 홀로선 나무의 모습으로 은유 해 내고 있다.

 

고독이란 무엇인가? 현대인의 고독과 삶을 정혜진은 나무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로 가져간다. 현대인의 고독은 여러 가지의 존재들에 둘러싸여 있는 연관 속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서로의 연관성 속에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삶의 보편적 정서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시로 고독을 노래하듯, 화가는 그림으로 고독을 본다.

 

정혜진이 보는 나무는 그것이 가로수이건, 숲 속에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들이건 간에 모두 인간의 모습으로 치환된다. 그는 특히 가로수의 단면적 시점에서 포착된 이미지가 그 자신이 나타내려고 하는 이미지와 가장 잘 부합된다고 말한다. 가로수의 일면적 시점에서 포착된 이미지는 시간에 휩쓸려 가는 자신의 한 모습이며 나아가 인간 모두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나무를 통해서 치환하고자 하는 인간의 고독이 지나치게 비극적 실존이라는 단면  만을 보고 있어 어두운 내면 심리를 드러내는 독백이기 쉽다. 그의 그림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고독은 타자와 자아를 구분하지 않는 고독임에도 철저히 고립된 독백으로 읽혀지기 쉬운 것은 고독의 방식이 주관적 자아의 집요한 천착에 있기 때문이다.

 

김 세 영 - 일상적 주제의 확대

김세영은 키가 크다. 그래서인지 그림도 크게 그린다. 그가 나타내는 주된 모티프는 우리들 주변에 놓인 일상적인 물건들에 있다. 드럼통 / 깡통 / 환풍기의 날개 등. 우리들 눈에서 쉽게 버려지는 사물을 그는 다이나믹한 이미지로 확대(환풍기의 날개)하거나 또는 동일한 주제를 같은 초점에 두고 반복해서 만들어 낸다.(석유통 그림) 그리고 똑같은 주제를 반복해서 그려내는 것은 우리가 쉽게 잃어버리는 것을 깊이 각인시키려는 의지로 보인다. 그래서 그의 동작은 반복하거나 확대하는 것으로 일상에 대한, 그리고 일상의 고통과 상처에 대한 주목과 극복을 동시에 이루려 한다.

 

그는 버려진, 그래서 폐기된 실체들을 그림 속으로 끌어온다. 이 과정은 그에게 있어 의식 행위와도 같은 것이다. 이 과정은 버려진 시간을 끌어 모아 붙잡아 두려고 하는 헛된 몸짓이 되기 쉽다. 그러나 그는 일상의 치유될 수 없는 시간들 속에서 고통을 이겨내고 삶을 체득해 나가는 자기 발전과정을 거친다. 김세영이 그의 작업들을 통해서 전달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  보다도 이러한 과정이며 그 과정은 자신과 타인의 삶의 일상에 배어 있는 기쁨과 슬픔, 고통과 사랑을 배우고자 하는 태도라고 본다.

 

김세영은 그 자신이 만나는 사물을 하나의 삶의 태도로 응시하고 그것을  화면의 한 가운데로 끌고 와 반복된 체험의 방식으로 만난다. 그가 만나는 것은 일상적 사물이 아니라 약동하는 생명력이고 예술에 대한 체험의 욕구인 것이다. 나는 그녀가 일상적 주제의 확대경 속에서 삶의 태도와 그 자신이 느끼는 작업의 방식이 성공적으로 활용되어 지리라는 생각을 한다.

 

 

 

                                        1 9 9 7 . 7 . 25

 

                                     예술마당 솔에서 김옥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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